몽골인들의 증류주 제조 모습을 담은 몽골 화가 샤라브의 ‘몽골의 하루’(1910년). 소주의 기원은 몽골로 추정된다. 몽골의 증류 기술이 정복 활동을 통해 널리 퍼지며 소주가 널리 사랑받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제공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술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자연의 선물이다. 과일이나 곡물 속의 당분을 효모가 분해하면서 알코올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증류주인 소주는 특별하다. 알코올의 비등점을 이용하여 분리해낸 인간의 노력과 과학 기술의 산물이다. 좋은 술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이 실크로드를 통해 전해진 결과가 바로 소주이다. 누구나 부담 없이 기울이는 소주 한 잔에 숨겨진 동서 문명의 교류를 살펴보자.》소주의 기원, 중국 아닌 만주
소주의 기원을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다. 왜냐하면 증류 기술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수천 년 문명의 발달 중에 점차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2500년 전에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방술(方術)이 중국으로 전해져서 진시황 때에 이미 다양한 방사(方士)들이 등장했다. 이때에 수은을 구워서 다양한 단약(丹藥)을 만드는 증류 기술이 발달했고, 알코올도 증류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호품으로 증류주가 널리 퍼진 것은 흔히 몽골제국 이후이기 때문에, 몽골이 소주의 기원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최근 중국 고고학계에서 흔히 배갈이라 불리는 중국의 증류주(백주)는 중국 기원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2006년에 만주 쑹화강 평원 한가운데인 지린성 다안의 한 배갈공장에서 건물을 새로 짓다가 땅속에서 거란 시대의 술고리(술을 빚는 솥과 쟁반)를 발견했다. 심지어 그 옆에는 10, 11세기에 만든 4000매의 동전이 그득한 돈 항아리마저 나왔다. 고고학자들은 발굴된 술고리를 복원했다. 술을 빚어서 2번을 걸러보니 지금 마시는 것과 거의 비슷한 40∼50도의 증류주가 나왔다. 이에 중국은 배갈이 서방이 아니라 중국 자체의 발명품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다.
하지만 만주의 평원지대인 지린성에 나온 것을 들어서 중국 기원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당시 이 지역은 중원과는 멀고 고려시대 우리와 북쪽으로 인접한 거란이 살던 지역이다. 그러니 중원이 아니라 만주에서 첫 번째 소주가 나왔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왜 하필 거란에서 첫 번째 증류주가 나왔을까. 유목민인 거란도 거대한 제국을 만들고 몽골까지 진출하여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다양한 교류를 했다. 이미 아라비아의 증류 기술은 그 전부터 널리 발달했으니, 그 기술을 이용해서 증류주를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한국도 신라 때에 이미 아라비아 및 페르시아의 상인들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지만 소주를 만들었다는 증거는 없다. 거란족이 최초의 소주를 만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바로 유목이라는 생활과 만주라는 지리환경 때문이다. 유목 생활을 하면서 빠르게 만들 수 있고 휴대하기 편한 증류주는 매우 요긴하다. 게다가 겨울이 길어서 알코올을 거르는 데 필수적인 냉각제로 얼음을 쓰기도 쉬웠다. 만주 지역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함께 살아서 수수와 같은 재료를 구하기도 쉬웠으니, 소주를 대량으로 만들기에 너무나 좋은 조건이었다. 고려는 거란과 여진 때에 다양한 술을 포함한 많은 물산을 수입했다. 그러니 최초의 소주는 몽골 침략 이전 이미 만주에서 발원해서 고려로 들어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고려 때 ‘이슬’로 표현된 소주
소주를 만드는 한국의 소줏고리 모습. 고려시대 때 소주는 ‘아랄길’이라 불렸는데, 몽고어로 증류시설을 뜻하는 ‘알렘빅’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고려시대에 이미 소주가 만주 일대에서 유행했지만, 황제의 행사에서만 쓰였다. 이것이 세계의 술로 등장한 것은 몽골제국의 등장 시기부터였다. 거대한 몽골의 정복 활동과 역참(驛站)으로 세계는 하나로 엮였고, 동서양 할 것 없이 몽골의 영향이 미친 곳은 모두 각자의 방법으로 증류주를 만들었다. 그 몽골의 영향은 지금도 ‘아라기’라는 이름에 잘 남아 있다. 몽골, 카자흐스탄, 튀르키예 등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은 물론이고 동남아 일대에도 그 이름은 남아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고려시대에 소주는 아랄길(阿剌吉)이라고 기록했고 최근까지도 아라기는 경상도 일대 방언에서 술 또는 술지게미를 의미한다. 아라기는 아라비아의 증류시설인 ‘알렘빅’에서 유래했는데, 아랍어로 땀이라는 뜻에서 비롯됐다. 술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모습이 땀과 같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 목은 이색(1328∼1396)의 시에서 이슬이라는 단어로 소주를 표현한 이래 지금도 이슬을 소주와 연관짓는다. 연상 단어는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불순물을 없애고 정화되어 가는 과정을 소주라고 묘사한 것이다.
근대 이후에 차(茶)와 도자기가 동서양을 잇고, 현대사회가 인터넷으로 소통하기 훨씬 전에 이미 세계는 소주로, 증류주로 대동단결한 셈이다. 소주가 가장 한국적인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술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3000년 전에도 있던 ‘폭탄주’
증류주와 도수 낮은 술을 섞은 폭탄주의 유래도 수천 년 전이다. 2500여 년 전 흑해 연안의 스키타이인들의 황금 잔 유물에서는 마약 성분이 검출되기도 했다. 사진 출처 archaeology 홈페이지 증류주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폭탄주이다. 20세기 이후 러시아에서 시작해서 한국으로 유입된 폭탄주는 무척 다양하지만, 그 핵심은 증류주와 도수가 낮은 술을 섞어서 적은 양으로 빠르게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원은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다양한 술과 약을 섞는 방법은 고대 사제들이 흔히 쓰던 방법이었다. 3000년 전의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은 실로시빈이라는 버섯과 소마라는 알코올 음료를 섞어 먹었다. 그리고 약 2500년 전 흑해 연안의 스키타이인들의 유물 가운데서 마약과 대마초 성분이 담긴 작은 황금 잔들도 발견되었다.
고대의 폭탄주는 일부 선택된 사제들이 신과 소통하기 위하여 취한 상태에 도달하려는 노력이었다. 반면에 지금의 폭탄주는 말 위에서 서로 잠깐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빈번한 유목민들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사정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도 남아 있다.
‘증류주 비법’ 퍼뜨린 몽골
소주와 같은 증류주가 가진 매력은 양질의 술을 쉽게 공급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그러한 기술의 발달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황실에서 증류주를 관리한 거란족과 달리 몽골제국은 비밀스러운 증류 기술을 널리 확산시켰다. 여기에는 또 다른 몽골만의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정복지에 소주를 전해주고 현지인들이 그 소주를 즐기다 보면 자연히 몽골에 대한 반감은 사그라지고 소주로 몽골의 세계에 동화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피지배인들을 알코올로 다스린 것은 몽골뿐이 아니었다. ‘술 식민주의’라는 용어가 있다. 지배 국가가 피지배인들에게 알코올을 공급하여 저항의 의지를 상실시키는 것이다. 러시아가 시베리아의 원주민을 정복할 때, 그리고 신대륙을 정벌한 유럽인이 알코올로 현지의 반발을 눌렀다. 소수의 몽골인이 거대한 제국을 통치할 때에 각지에 도수 높은 증류주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공여했을 것이다. 지나친 술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삶의 괴로움을 달래는 약간의 소주가 마냥 좋을 수만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서양을 가로지르며 완성된 증류 기술은 소주로 완성되었으니, 실크로드는 바로 소주의 길이었다. 내가 마시는 소주 한 잔에는 바로 동서 문명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지혜가 있었고, 또 애환도 숨어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술 한 잔만큼 서로의 경계를 누그러뜨리고 하나로 만드는 음식은 없다. 과음의 폐해는 조심해야겠지만, 서로 총칼을 겨누고 죽이는 것보다는 백배 낫지 않은가. 한 잔의 소주로 서로를 이해하는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요즘이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